갑신정변 실패 후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어떻게 됐나요? : 지식iN
갑신정변 실패 후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어떻게 됐나요?
- 5st****
- 질문 6건 질문마감률83.3%
- 2013.04.03 21:47
추천 수 1
- 답변
- 1
- 조회
- 834
1. 갑신정변은 어떤 단계로 이루어졌나요?
2.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난 후 김옥균, 박영효 등의 주역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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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갑신정변 실패 후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어떻게 됐나요?
- chokirhyun
- 답변채택률74.6%
- 2013.04.03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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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1. 발발(1884년 12월 4일)
1884년 12월 4일에 지금의 우체국에 해당하는 우정국 개국식이 있었습니다. 김옥균 등 개화파는 우정국 개국식 때 수구파를 처단하고 정변을 일으키기로 합니다 . 우정국 옆에 있던 별궁에 불을 지르기로 하지만 그것이 잘 되지 않자 옆에 있던 민가에 불을 지릅니다. 그리고 불 때문에 소동이 일어난 틈을 타서 수구파들을 죽이려 했지만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에게만 중상을 입혔을 뿐 이 계획은 틀어집니다.
2. 고종을 경우궁으로(1884년 12월 4일)
우정국에서 개화파들은 당시 고종이 머물던 창덕궁에 옵니다. 그리고 고종을 알현하면서 청국군이 난리가 났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때마침 미리 묻어두었던 화약이 주변에서 터지는 바람에 고종은 개화파의 말을 믿었고 경우궁이라는 조그마한 왕실 사당에 사실상 유폐됩니다.
개화파는 최고 권력자인 왕을 가두고 일본군에 군사를 요청한 뒤, 수구파의 중심 인물들을 차례로 제거합니다.
3. 신정부 수립(1885년 12월 5일)
그런 뒤 김옥균 등은 미리 계획된 대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합니다. 이 와중에 명성황후는 청군에 비밀리에 연락하여 도움을 요청하고, 좁은 경우궁이 답답하다며 창덕궁으로 되돌아갈 것을 요구합니다. 개화파는 군사 수도 적었고 일본군도 많은 편이 아니었기에 넓은 창덕궁은 방어하기에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김옥균은 반대하지만 결국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창덕궁으로 어가를 옮깁니다.
4. 14개조 정강과 정변 실패(1885년 12월 6일)
12월 6일에는 개혁안을 담은 14개조 정강을 꾸미고 고종의 결재를 받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청군이 창덕궁에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들어옵니다. 일본군과 개화파는 군사 수가 적어 패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개화파 중 상당수는 인천 제물포로 도망가 일본 군함으로 도망쳐 일본으로 망명하게 됩니다. 결국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5. 갑신정변 주역들의 최후
김옥균, 박영교,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홍영식 등이 갑신정변 주역들입니다.
1) 이중 박영교(박영효의 형), 홍영식은 끝까지 고종과 있다가 청군에게 죽습니다.
2) 김옥균
김옥균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냉대와 조선의 암살 위협 속에서 10년을 살다 청나라 상하이로 1894년 건너갔다가 그곳에서 홍종우에 의해 암살됩니다.
암살당한 후 그의 시신은 조선에 들어와 능지처참 당했으며, 목은 잘려 효수되었습니다.
이후 1895년 복권됩니다.
3) 박영효
박영효는 일본에서 10년 동안 망명생활을 하다가 1894년 갑오개혁으로 복권되어 들어와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에 앞장 섭니다. 그러나 정치 싸움에 휘말려 죽을 위기에 처하자 1895년 다시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1907년 복권되어 들어와 친일 하면서 호의호식하다가 천수를 누리고 죽습니다.
4) 서광범
서광범도 일본으로 갔다가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미국에서 살면서 시민권도 얻다가 1894년 복권되자 그 역시 조선으로 다시 돌아와 갑오개혁에 가담합니다. 그러나 을미사변 후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고, 미국에서 1897년 병사합니다.
5) 서재필
서재필은 서광범과 먼 친척으로,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갑니다. 미국에서 어렵게 공부하면서 의사가 되어 미국 시민권을 얻고 활동합니다. 1895년 복권되어 들어와 1896년부터 독립협회 활동을 주도하면서 계몽 운동을 펼칩니다. 그러나 이것이 수구파의 반발로 실패로 돌아가자 1898년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 미국에 머물면서 독립운동을 합니다. 그러다 광복 후 귀국하여 여러 정치 활동에 가담하고 이승만의 견제 인물로 부상하여 대통령 추대까지 받았으나 거절하고 다시 미국으로 출국하였다가 1948년 일시 귀국 후 미국으로 되돌아가 1951년에 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