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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 대학살 20년…재건의 원동력은 '화해' : 네이버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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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4. 3. 01:13
◇ 20세기 말에 빚어진 '인종청소'…3개월 만에 100만 명 살해
인구의 85%를 차지하는 토착 후투족과 소수 투치족 간의 갈등은 1916년부터 벨기에가 르완다를 식민통치하던 시절 투치족을 우대하고 후투족을 홀대하는 종족차별정책을 펴면서 비롯됐다.
소수의 투치족에게 권력을 줌으로써 다수의 후투족과 대립하게 하는 것이 지배하는데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벨기에로부터 독립하기 3년 전인 1959년 후투족이 투치족 왕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 1당 독재가 시작되면서 종족갈등이 본격화됐다. 수년에 걸쳐 수천 명의 투치족이 학살되었고 투치족은 르완다 애국전선(RPF)을 결성, 1990년 내전을 시작했다.
1994년 4월 후투족 출신인 르완다 대통령과 부룬디 대통령이 함께 탄 전용비행기가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에서 추락해 사망하자 후투계 정권은 이를 RPF의 암살로 간주, 투치족과 온건 후투족을 무차별 학살하는 초유의 대참사를 불러 일으켰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학살이다.
규모가 엄청났지만 학살 행태도 끔찍했다. 남편이 소수민족 아내를, 교사가 학생을, 신부가 성당으로 숨어든 소수민족 도주자들을 살해했다. 수많은 여성이 간강당하고 아이들은 불에타 죽거나 수장되기도 했다.
우간다 등에 피신해 있던 투치계 RPF가 후투 정권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1994년 7월 대학살은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