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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머니 박완서 : 네이버 뉴스

!!! 2015. 2. 26. 00:37

 

나의 어머니 박완서

기사입력 2015-02-25 11:10

기사원문 27

어머니 박완서 작가 사진을 배경으로 박씨의 맏딸인 호원숙씨가 사진을 찍었다.

평생을 썼던 낡은 책상 그 위에서, 어머니의 모든 작품이 나왔다
입춘이었다. 겨우내 마당에 자주 나가 보지 않다가 따스한 햇살이 자연스럽게 마당으로 이끌었다.
남편은 실장갑을 끼고 낫과 톱과 전지가위를 갖춰 들고 나온다.
웃자란 매화 가지를 쳐주고 이미 시들어버린 국화, 부추, 개미취의 힘없는 쭉정이 가라지들을 잘라 정리한다. 홍매화 가지를 치며 나뭇가지의 붉은빛을 보고 흠칫 놀라워한다. 꽃만 붉은 것이 아니고 가지의 속살도 꽃처럼 붉구나. 백매화는 하얀 연둣빛인데.
어머니가 동쪽 담 옆에 심은 홍매화가 이제 곧 피어오르겠지.
지난 1월 어머니의 4주기에 1970년대 1980년대 초기 산문집 7권(문학동네)을 내고 나니 이제 봄을 기다리는 일만 남은 듯 가뜬하다. 둘이서 오전 내내 땀을 흘리며 하는 일이었지만 힘든 줄을 모르고 빗자루로 마른 잎들을 쓸어낸 뒤 고운 잔디 위를 걷는 것만으로도 가뜬하다. 이런 가뜬함이 나에게 주어진 것이 참으로 감사하다.
지난 연말 그 책들의 교정지가 택배로 한 박스 실려왔는데 참으로 그 순간 어쩔 줄 몰라했다.
그 무게와 두께에도 질렸지만 교정을 보는 일이 단순작업이 아니고 정신을 집중해야 하고 글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나는 언제나 어머니의 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물론 그 일을 출판사의 전문편집인들에게 일임한다고 해서 큰일 나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절판된 책의 내용을 다시 입력한 것이라 오자나 오류가 있을 수 있었다.
나는 동생들을 불러 일을 나누었다.
그전 같으면 혼자서 감당할 일이었지만 동생들은 모두 기꺼이 협조해 주었고 한 단어 한 구절 교정을 보는 것을 같이 의논했다. 그렇게 하는 자체가 어머니가 바라던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혼자서 끌어안았으면 버겁고 고통스러웠을 일이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되었다.
내 생각과 기억이 미치지 않는 엄마 글의 속살을 같이 체험했다. 엄마는 우리를 얼마나 골고루 끔찍하게도 사랑하고 치열하고도 열심히 사셨는가. 세상사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우려하고 비판하기도 하였지만 아름다운 사람과 사물은 얼마나 칭찬하고 축복해 주었나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소설에서는 맛볼 수 없는 담박하고도 아름다운 삶의 속살을 다시 대하게 되었다. 자식들의 나이가 10대에서 30대에 이르는 젊은 시절이었을 당시 식구들의 활기찬 드나듦, 여름 바닷가에서 묻혀온 청바지 속 모래알까지 엄마의 글을 통해 우리의 젊음이 재현되는 기쁨을 맛보았다. 이영도 선생님께 선물받은 만년필에 관한 글은 슬프도록 아름다웠다.
어린 제자들을 위해 유리창을 닦다가 사고를 당한 어느 교사를 추모하는 글, 성자와도 같은 구두를 고치는 아름다운 청년, 의과대학에 다니는 딸의 책상 서랍에서 본 해부학시간에 가져온 뼈다귀. 한옥 마당에 잔디씨를 심는 모습, 첫 손자를 본 순수한 기쁨, 그 글을 쓸 당시 작은 소반에 원고지를 놓고 안방에서 글쓰던 모습이 떠오른다.
어머니가 책상을 갖게 된 것은 아주 뒤늦게 아파트로 이사를 와서도 한참 뒤였다. 서재를 갖게 된 것은 작가로 데뷔하시고도 15년이 넘게 지난 뒤였다. 돌아가실 때까지 그 책상을 쓰셨으니 25년을 넘게 쓰신 것이다. 그런 것으로 불평을 하는 말씀을 들은 적이 없다. 바꾸어 드린다고 해도 의자만 바꾸었을 뿐 한 책상에서 평생 글을 쓰시다 가신 것이다.
글을 쓰시는 시간은 늘 새벽부터 오전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어머니의 시간은 자로 잰 듯한 딱딱한 규칙이란 것은 없었다. 언제나 유연했고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더 중요한 일, 예를 들어 가족에게 더 중요한 일이 생긴다면 글 쓰는 일은 언제나 뒤로 미룰 수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소위 글 쓰는 약속을 ‘빵꾸(?)’ 내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소설뿐만 아니라 이렇게 많은 산문을 남기신 것은 아무리 작은 매체라도 거절하지 않고 청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발행부수가 많은 유명 일간지뿐 아니라 지방지나 사보에까지 받은 청탁을 거절하지 않으셨다. 거기에도 어머니의 마음이 드러난다. 차별을 하지 않으려는 마음. 사람을 볼 때도 그랬던 것과 같이. 간곡하게 청탁을 하면 원고료가 얼마인지 물어보지 않고 “예 써드리지요” 하며 대답하시던 그 목소리가 생각난다. 단호하면서도 청에 못 이기는 듯한 체념하는 목소리.
1970~1980년대에 쓴 7권의 산문집은 어머니의 가장 힘든 시기의 초상이기도 하여 읽으면서 마음이 아파오기도 했다. 어머니의 소설에서도 나오지만 망령이 든 시어머니와 지내면서 글을 써야 했던 기간도 어머니와 우리 가족들에게 힘든 시기였다. 잠에 들기 위해, 연재 소설 원고의 마감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수면제를 먹을 수밖에 없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얼마나 무서웠던가. 이러다가 우리 엄마가 다 망가지는 것이 아닐까? 차라리 할머니가 빨리 돌아가시기를 바라며 죄의식에 가슴을 졸였던 시기가 있었다.
우리의 그런 가족사가 ‘살아 있는 날의 시작’이나 ‘해산바가지’ 같은 작품에서 소재의 밑거름이 되어 훌륭한 문학작품으로 다시 되살아난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던가.
이번에 7권의 산문집을 내며 놀라웠던 것은 젊은 편집자들의 반응이었다. 물론 작가의 인지도나 인기도 때문에 책을 내는 것에 상업적인 측면을 외면할 순 없지만 어머니의 손자뻘도 안 되는 젊은이들이 교정을 보면서 박완서 글에 빠졌다고 했다. 점심시간마다 글 속의 에피소드가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애초에는 절판된 책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출간하기로 한 것인데 젊은 세대들에게도 읽히고 싶었다. 정직하게 세상을 보는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다. 지금 조간신문에 내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소재나 문체가 빛나고 있었다. 단지 화폐가치가 달라졌을 뿐.
7권의 산문집 표지에는 각각 어머니의 유품으로 사진 이미지를 넣었다. 그 물건들은 하나같이 어머니의 손과 눈길이 닿았던 것이어서 따뜻한 기억으로 이끌어 준다.
끝으로 ‘어미의 5월’(7권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이란 글을 인용하고 싶다.
“작년에 사고로 아들을 잃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순전한 사고였기 때문에 원망은 복받치건만 원망할 대상이 없다”로 시작하는 글은 “마지막으로 어미의 배를 빌려 태어난 이 땅의 아들딸들아, 제발 죽지만 말아다오. 남을 죽일 위험이 있는 짓도 말아다오. 설령 네 목숨과 지상의 낙원을 바꿀 수 있다 해도 네 어미는 결코 그 낙원에 못 들지니.”
이렇게 끝난다.

호원숙
1954년 서울에서 호영진·박완서의 맏딸로 태어났다. ‘뿌리깊은 나무’ 편집기자로 일했으며 1992년 박완서 문학앨범에 일대기 ‘행복한 예술가의 초상’을 썼다. 2011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살던 경기도 구리시 아치울에 머물며 ‘박완서 소설 전집’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등을 출간하는 데 관여했다. 2015년 산문집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를 내었다. 경운박물관 운영위원으로 일한다.

/ 호원숙 경운박물관 운영위원·작가 박완서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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