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는 만물박사가 아니라 한우물 파는 사람”
1960년대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천재 소년 김웅용이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와 대학교수가 됐다. IQ 210으로 동시대 어린이들을 열등의식에 빠지게 했던 그는 네 살 때 4개 국어를 하고 다섯 살 때 일본 후지 TV에 출연해 도쿄대 교수가 낸 미적분 문제를 풀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여덟 살 때는 미국항공우주국(NASA)에서 연구원 생활을 했다. 그러나 너무 어린 시절의 해외 생활은 천재를 꽤나 힘들게 했나 보다. 미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그는 국내로 유턴해 뒤늦게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충북대학교 토목공학과 81학번인 그는 모교에서 석·박사를 학위를 받은 뒤 여러 대학에서 시간강사를 하다 충북도시개발공사 사업처장을 거쳐 의정부에 있는 4년제 신한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최근 임용돼 다시 한번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17일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무척 쾌활해 보였지만 과거 이야기는 피했다. 그러나 영재교육관에 대해 물어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우선 우리나라 영재교육에 대해 한마디 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