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교육 오늘의 역사] 1928년 오늘 만주모중대사건 발생
머니투데이 MT교육 정도원 기자 | 2013.06.04 08:30
만주모중대사건으로 인해 폭파된 귀빈 열차.
1928년 오늘(6월 4일) 만주모중대사건이 발생했다.
◆일본과 하등 관계 없지만 일본 수상에게까지 책임을 미치는 사건?
일제감정기 하인 1929년의 동아일보를 보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1면에 만주모중대사건 관련 기사가 나온다. 만주모중대사건은 "내각불신임의 계기가 될 것인지는 별론으로 하고" "국제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사건"이라며 "사건 자체는 일본과 하등 관계 없지만 남만주철도 교차점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수비대의 경비 책임은 고려할 여지가 있다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군부는 경비 책임을 묻는다 함은 마치 사건이 일본과 관계가 있는 듯한 오해를 줄 여지가 있고" "시라카와 요시노리 육군상과 다나카 기이치 수상에게까지 책임을 미칠 우려가 있다"는 보도가 잇따른다.
대체 무슨 사건이기에 일본에서는 내각을 붕괴시키고 국제적으로도 중대한 영향을 미치며, 일본 정부와 군부가 대립하고 육군상과 수상의 거취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그것도 거듭 강조하듯이 '일본과 하등 관계 없는 사건'으로 인하여 이런 것이 가능할까. 사건 제목조차 만주모중대사건이라며 비밀에 부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1920년대 군벌 장쭤린과 일본의, 만주에서의 '부적절한 관계'
청나라가 무너진 뒤 혼란에 빠진 중국. 만주를 지배하고 있던 것은 펑톈(지금의 중국 랴오닝성의 선양)의 군벌 장쭤린이었다. 일본은 그를 비호해주는 대가로 사실상 만주를 '간접 지배'하고 있었다.
1925년 장쭤린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츠야 미야마츠는 '미츠야 야합'을 체결했는데 '장쭤린은 만주의 조선 독립운동가를 일본 영사관에 넘기는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상금을 받고, 장쭤린은 그 중 일부를 반드시 실제로 단속한 관원에게 지급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이 뒤로 만주 관원들은 자기 호주머니를 채울 수 있는 독립운동가 검거에 열을 올렸다. 1927년에는 도산 안창호 등 300여 명의 독립운동가가 일제히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지린대검거사건). 일본과 장쭤린은 이처럼 야합해 '부적절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1928년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가 군벌들을 쳐부수고 중국을 재통일하기 위해 북벌을 단행하자, 본래 오합지졸에 불과하던 장쭤린은 패전을 거듭했다. 장제스와 결전으로 맞설 자신이 없던 장쭤린은 베이징에서 탈출해 열차를 타고 자신의 본거지인 만주 펑톈으로 도망하고 있었다.
◆일본, 이용 가치 없어진 장쭤린 폭살시켜
'이대로 잠자코 지켜보면 국민당 군대는 만주까지 쳐들어와 장쭤린을 몰아낼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만주 전역은 국민당이 직접 지배하게 되고, 일본은 지금처럼 만주를 간접 지배할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만다.'
이렇게 생각한 일본은 이용 가치가 없어진 장쭤린을 제거하고 만주를 직접 지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만주에 주둔하던 일본 관동군의 고모토 다이사쿠 참모가 입안한 음모였다.
1928년 6월 4일 새벽. 장쭤린에 탄 귀빈 열차가 지나가던 남만주철도 교차점에서 미리 매설해 두었던 다량의 폭약이 폭발해 장쭤린은 폭살당하고 말았다.만주모중대사건의 현장 조사 광경.
◆전모 만천하에 드러나… 일본과 조선에서만 '눈 가리고 아웅'
일본 관동군은 중국인 노숙자 3명을 현장으로 끌고 가 총검으로 찔러 살해한 뒤, 이들을 중국 국민당 요원이라 주장하며 범행을 덮어씌우려 했다. 그러나 3명 중의 1명이 기적적으로 살아나 현장을 탈출해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에게 고변하는 바람에, 일본의 음모는 만천하에 드러났다.
장쉐량은 중국 국민당과 화해해 '아버지의 원수' 일본과 대항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1928년 12월, 그간 장쭤린의 영향력 하에 있던 만주 전역에 중국 국민당을 상징하는 청천백일기가 내걸렸다. 음모를 꾸몄던 일본은 되레 만주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러한 영향력 상실을 억지로 만회하려는 무리수가 1931년 만주사변의 원인이 됐다.
한편 음모가 국제사회에 알려져 일본은 미국, 소련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비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집안에서만큼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던 일본은 해가 바뀐 1929년까지도 해당 사건을 "전모가 드러나지 않아 분명치 않다"는 이유로 '만주 모 중대사건'이라 부르게 했다. 또 모든 사람들이 이미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음에도, 사건의 전모를 조사한다는 구실로 "이 실패가 누구의 책임이냐"며 정부와 군부에서 정쟁만을 일삼았다. 세계적으로 전모가 다 드러난 장쭤린 폭살 사건이 이듬해 일본, 그리고 조선에서는 여전히 신문 1면을 달구는 현재진행형이었던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