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최연소'부터 '깜짝이야'까지…최영철 앵커 고별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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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최연소’부터 ‘깜짝이야’까지…최영철 앵커 고별 인터뷰
    • 입력2014.12.31 (20:50)
    • 수정2014.12.31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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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년 10월, ‘KBS 최연소 앵커’로 등장한 최영철 앵커가 이제 취재기자로 돌아갑니다. 오늘(31일) 마지막 방송을 준비하는 최영철 앵커를 만났습니다.
    - KBS 메인뉴스 앵커로 대한민국의 9시를 책임졌습니다. 마지막 방송을 앞두고 있는데 기분이 어떤가요?
    “정확하게 1년 2개월하고 10일 동안 9시뉴스를 맡았습니다. KBS 9시뉴스 진행은 300회 정도 했습니다. 그동안 신뢰받는 뉴스를 만들고 전달하기 위해 모든 걸 쏟아 부었기 때문에 여한이 없습니다.”
    - KBS에서 최연소로 메인 뉴스 앵커가 되셨어요. 부담되진 않았나요?
    “처음 ‘9시 뉴스’라는 KBS 간판 뉴스의 앵커를 맡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쁨보다 부담감이 앞섰습니다. 앵커가 되기 전 15년 동안 취재 경험을 쌓았지만, 앵커를 맡은 건 처음이었습니다. 그 부담에 초기에는 몸무게가 3㎏이나 빠졌습니다.”
    - 그 부담과 긴장을 어떻게 극복했나요?
    “아내 최원정 아나운서는 ‘9시 뉴스’ 앵커 선배입니다. 아내의 냉철한 방송 모니터와 수시로 지적해 주는 원 포인트 레슨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 7위에 올랐습니다. 영향력을 체감했나요?
    “KBS 메인앵커라는 이유 하나로 시사저널이 해마다 뽑는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공동 7위에 올랐습니다. 주중 평균 20%에 달하는 시청률이 주는 압박감도 상당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모든 뉴스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KBS 9시 뉴스 앵커는 어떤 사안에 대해 가치 판단을 최소화 합니다. 누군가는 후련할 수 있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비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KBS 앵커들이 클로징 멘트를 자제해왔던 이유입니다."

    - 가장 기억에 남는 보도는 무엇인가요?
    “당연히 세월호 참사 관련 보도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특히 참사 한 달을 맞은 5월 15일에는 진도 앞바다 현장을 헬기로 둘러보며 오프닝을 했습니다. 그날은 세월호 보도와 관련된 KBS 뉴스에 대한 뼈를 깎는 사과와 반성을 담았습니다. KBS 뉴스 자체가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고육지책이었습니다.”
    - 가장 힘들었던 순간도 같은가요?
    “솔직히 당시 진도 앞바다를 헬기로 돌아보고 있을 때 ‘차라리 내가 이 바다에 빠져 순직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KBS 뉴스의 떨어진 신뢰도를 다시 회복할 수 있다면 또 우리 KBS 기자들의 진정성을 보여줄 수 있다면 정말 그렇게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앵커로서 제작거부에 나선 초유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렇게 됐네요. 하지만 그건 일종의 기회였습니다. KBS 기자들이 KBS 뉴스를 살리기 위해 죽기로 한 것입니다. 올해 갓 들어온 신입 기자들부터 KBS 보도국의 부장 선배들까지 모두 제작거부에 나섰습니다. 앵커 이전에 KBS 기자로서 당연히 동참하는 데 뜻을 모았고, 사상 초유의 9시뉴스 앵커의 제작거부가 현실화됐습니다. 스튜디오가 아닌 광화문 광장에서 국민들 앞에 홀로 섰습니다. 9시뉴스가 파행되는 모습을 보여준 것에 대해 국민 앞에 의무를 저버린 것에 대해 죄송스럽지만, KBS가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선 그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 그래도 즐거웠던 추억도 있겠죠?
    “파업이 끝나고 이어진 ‘문창극 총리후보자 검증보도’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 보도는 기자협회와 방송기자협회, BJC에서 모두 기자상을 받는 3관왕을 차지했습니다. 기자로서 처음 교육받을 때 ‘언론의 역할은 검증에 있다’는 걸 금과옥조처럼 배웠습니다. 언론검증의 칼날은 기자 출신 첫 총리후보라고 해서 비켜갈 수는 없는 것이었죠. 그렇지만 이 보도 때문에 KBS는 방통심의위원회의 징계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게 우리 사회구나’라는 생각을 참 많이 했던 계기가 됐습니다.”
    - 이렇게 무거운 이슈만 있던 것은 아닙니다. ‘깜짝이야 앵커’로 유명한데…
    “아이고, 그걸 말하다니(웃음). 그동안 뉴스하면서 사소한 방송사고는 있었지만, 그 ‘깜짝이야’ 사건은 대박 사건이죠. 뉴스 진행중에 카메라 컷이 잘못 온 상황에서 “아이 깜짝이야~”라고 말한 게 그대로 방송을 탄 것입니다. 주변에서 많은 반응이 있었는데, 모두들 “평소 성격 나왔다”고 하더군요. 사실 욕을 잘 안하는데, 다른 사람들 같으면 'C'로 시작하는 말 정도는 했을 거라며 칭찬아닌 칭찬도 받았네요.“
    - 타사 메인 앵커들에 대한 평가를 해볼까요?
    “모두 경쟁력 있고 훌륭하신 선배들이라 제가 감히 평가를 하는 건 맞지 않다고 봅니다. 제 자신에 대한 평가부터 한다면 최근 KBS 저널이 평가한 부분을 인용해 갈음하겠습니다.”

    - 거리에 선 앵커, <9시 뉴스>; 최영철 기자
    뉴스 데스크 앞에 있어야 할 앵커가 거리로 나갔다. 그것도 시청률 20%를 자랑하는 <9시 뉴스>; 앵커가 마이크를 내려놓은 이유는 뭘까. 세월호 침몰사고 보도 과정에서 KBS 뉴스의 공정성과 독립성 문제가 불거지자, 지난 5월 최영철 앵커는 광화문 광장 땡볕 아래서 1인 시위를 벌였다. 불편한 진실이 드러나는 상황에서, KBS가 신뢰를 얻고 새롭게 다시 태어나길 촉구한 것. <9시 뉴스>;앵커가 직접 행동에 나선 것은 전무후무한 역사다. 최영철 앵커는 19일 만에 다시 마이크를 잡았고, 전환점을 거친 <9시 뉴스>;는 계속 시청자와의 약속을 지켰다. 그만큼 언론 내부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진 계기였다.
    - 온에어가 꺼지면 어떤 모습인가요? 최영철 앵커의 폭탄주 제조법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앵커를 하면서 술이 조금 늘었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9시뉴스라는 그 자체의 무게가 크고 1시간 동안 생방송의 긴장감 속에 있다 보면 끝나고 술 생각이 안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앵커에게는 긴 시간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폭탄주를 즐기는 변명이라고 할 수 있죠. ‘암바사주’라는 것을 즐기는데, 소주와 맥주 그리고 사이다를 섞으면 우윳빛이 돕니다. 그거 한두 잔이면 술자리도 빨리 끝나고 안주값도 별로 들지 않습니다. 다들 만취해서 집에 가니까요.”
    - 마지막 방송이네요. 방송 끝나면 무슨 계획이 있나요?
    “일단 스탭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맥주 한 잔 정도 할 생각입니다. ‘암바사주’를 만들지는 아직 모르겠네요. 내일도 9시 뉴스는 계속돼야 하니까요. 내일부터 저는 다시 제 본업으로 돌아갑니다. 앵커이기 전에 기자였기 때문에 다시 기자로 돌아가 본분을 다할 예정입니다. 다만 지난 15년 동안 쉴새없이 달려왔기 때문에 윗분들 배려로 1월에는 비교적 긴(?) 기간의 휴가를 쓸 수 있을 것 같고, 모처럼 가족들과 여행도 갔다올 생각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짜리 아들이 있는데 내년부터는 더 좋은 아빠가 되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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