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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무, 그가 그립다!! 이백만의 활동

2015/01/07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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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무와 노무현, 노무현과 박무~

어제 박무 선배님을 추억했다. 파주 동화공원묘역에서 열린 10주기 추도식에서~. 박 선배님은 한국일보 편집국장을 지냈고 머니투데이 창업을 주도했다.

박 선배님은 노무현 대통령과도 인연이 깊다. 그는 노무현의 ‘숨은 경제참모’였다. 나를 노무현 대통령에게 소개해 준 사람이 바로 박무 선배님이다. 2002년 1월초,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새천년민주당의 상임고문이었다. 대선 출마의사를 표명했지만 지지도가 2% 안팍에 불과했다. 이인제 대세론에 밀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노무현 상임고문, 박무 사장과 함께 인사동의 허름한 밥집에서 저녁을 같이했다. 나는 그날의 만남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노무현이 만난 링컨’을 선물로 받았다. 식사를 마치고 집에 와서 한달음에 다 읽었다. 정말 재미있었다. 그것이 노무현과의 첫 인연이었다.

당시 박무는 머니투데이 사장, 나는 머니투데이 편집국장이었다. 우리도 선물을 하나 주었다.

여의도 증권가의 애널리스트와 펀드매니저를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2002년 대권 잠룡 가운데 ‘시장이 가장 신뢰하는 대권후보’ 부문에서 노무현이 1위를 했다는 뉴스였다. 노무현은 이 말을 듣고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이런 조사가 있었느냐는 듯, 의아해 하면서 전후 사정을 알아보기에 바빴다. “우리들도 결과가 뜻밖이어서 확인조사를 다시 했다. 시장은 확실히 노무현을 선호하고 있다”고 말했더니 환한 웃음을 지었다. 언론매체에 ‘노무현 1위’라는 활자가 박혀 나온 것은 머니투데이 처음이었다.

이회창 후보와 TV 토론 때 이 자료가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회창은 노무현이  노동운동을 한 경력을 들먹이면서 노무현이 대선에서 당선되면 주가가 폭락할 것이라고 공격하자, 노무현은 무슨 소리하느냐면서 머니투데이의 조사결과를 순발력있게 제시하여 이회창을 머쓱하게 만들고 말았다. 보기 좋은 역공이었다. 

박무 선배님이 대선 때 노무현 후보를 물밑에서 많이 지원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두 분간에 통하는 뭔가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였을까. 노 대통령은 취임 초 박무 선배에게 국가의 중책을 제의했다. 그러나 박 선배는 언론의 길을 가겠다면서 정중하게 사양했다.

이날 추도식에는 박무 선배님의 절친들이 대거 참석했다. 참여정부에서 경제부총리를 지낸 이헌재 장관과 이병완 청와대 비서실장이 오셨다. 그리고 김선옥 전 공정거래위원장, 신영무 전 대한변협 회장, 오호수 전 증권협회 회장, 김재실 전 산은캐피털 사장, 임철순 전 한국일보 주필, 이종재 이투데이 사장 등도 참석했다.

박무 선배님과 나와의 인연 또한 깊다. 나를 언론인으로 이끌어 주고 키워 준 분이 바로 박무 배님이다. 나는 언론계 현역시절 영광스럽게도 ‘박무 사단’의 일원이었다. 20년 가까이 친형제처럼 지냈다.

주최측에서 나에게 약력보고를 해달라고 했다. 편년체식의 약력보고는 너무 단순하고 지루할 것 같았다. 대신 박무 선배님이 살아온 여정을 간략하지만 정중하게 정리하여 낭독했다.

<박무 약력보고 - 선배님의 호민관론과 특유의 친구론>

이백만(전 청와대 홍보수석)

박무 선배님과 저와의 개인적 인연에 대해 먼저 말씀 드리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대학 4학년 때인 1978년 저는 서울경제신문 정경부 기자였던 고인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 후 언론계 선후배로서, 회사 상사와 부하로서 인연의 끈을 이어 왔습니다. 벌써 37년이 지났습니다.

고인은 후배 기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종종 했습니다. “경제기자는 호민관이 되어야 한다. 로마시대 서민들의 경제를 지켜준 호민관!” 그리고 친구 사귈 때 명심해야 할 사항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진정한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가 가장 아끼는 것 세 가지를 줄 수 있어야 한다. 그 세 가지는 건강과 시간과 돈이다.” 자기 몸을 아끼지 말고 친구와 술을 마셔주고, 아무리 바쁘더라도 시간을 내어서 친구의 고민을 들어주고, 친구가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했을 경우 가진 돈을 조건 없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고인은 몸소 이를 실천했습니다. 한번 인연을 맺은 친구라면,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인연의 끈을 놓지 않는 단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이겠지요, 추모집 제목처럼 고인은 ‘대한민국 경제기자’이면서 ‘세계 최고의 친구 부자’였습니다.

고인 특유의 ‘친구론’과 ‘호민관론’은 ‘인간 박무’와 ‘언론인 박무’를 관통하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뜻 깊은 추모의 날, 이 키워드를 중심으로 고인과 함께 했던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려 봤으면 좋겠습니다.

고인의 살아생전의 여정을 보고해 드리겠습니다.

고인께서는 해방을 1년 앞둔 1944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4.19혁명이 일어났던 1960년 중동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1963년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에 입학했습니다. 63학번입니다. 대학 2학년 때 6.3사태를 맞았습니다. 사병으로 병역의무를 마친 후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1971년 장귀희 여사님과 결혼하여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습니다. 여러분들 잘 아시지요? 두 분의 연애 스토리와 결혼 이야기 말입니다. 무려 8년(10년이라는 이야기도 있다)의 연애 끝에 결혼에 골인했고, 평생 한눈 팔 지 않고 살았습니다. 친구를 사귀는데 있어어도 장여사님과 연애하듯, 그리고 결혼하듯 한 것 같습니다. 사람과의 인연을 그렇게 중히 생각했다는 이야기지요.

고인은 1974년 1월 한국일보 견습29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한국일보에서 경제부장 논설위원 논설위원실장 편집국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신문사 편집국장은 언론사의 꽃이라고 합니다만, 고인은 그 꽃의 영광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습니다. 편집국장이 됐던 1999년은 IMF사태로 국가경제와 회사경영이 극도로 악화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고인은 언론인으로서의 사회적 역할도 활발하게 했습니다. 금융산업발전심의위원회 위원, 증권선물위원회 비상임위원, LG상남언론재단 이사, 신한생명 고문 등을 지냈습니다. 특히 국가의 미래를 고민하는 지식인들의 모임인 나라발전연구회(나발연)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국가 고위직 참여는 사양했습니다. 참여정부 시절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대통령으로부터 정무직 고위공직자로 행정부에서 일해 달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많은 고민을 한 끝에 언론의 길을 지키고자 대통령의 제의를 사양했던 것입니다.

2001년 6월 머니투데이 대표이사로 취임하여 온•오프라인 경제신문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그리고 딱 10년 전 오늘 2005년 1월 6일 사랑하는 가족과 많은 친구들을 남겨 놓고 먼저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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